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의 티베트 침공 (문단 편집) === 승리 선언과 국제사회의 외면 === 라싸 정부는 어디까지나 중앙 티베트만을 지키며 사태가 중앙 티베트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인도의 매스컴이 티베트 대표단에게 중국의 침공에 대해 묻자 그런 사실이 없다며 부정하고 중국의 태도를 묵인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중국군은 환영하는 모습과 항복조인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언론에 내보내며 선전활동에 열을 올렸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 정부는 중국군의 티베트 진주를 선언했다. 당시 국제사회의 관심은 [[6.25 전쟁]]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문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미국]]은 [[소련]]을 제거하려는 데[* [[마셜플랜]] 참고]만 열중하고 있었고 20세기 초반에 티베트와 관계를 맺었던 영국은 1950년 1월 인도를 독립시킨 후 더 이상 티베트와 지리적으로 무관해졌기 때문에 이들의 운명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인도는 중국과 당시에는 우호적인 관계였고 [[파키스탄]]과의 분쟁으로 인해 제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굳이 티베트 문제로 중국의 어그로를 끌려고 하지 않았다. UN총회 운영위원회도 <티베트와 중국, 인도에 평화를 위해서도 UN에서 토의하는 것은 걸맞지 않다>고 하여 심의의 연기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전의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마찬가지로 중공은 이 지역의 영유권을 선언했고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0일 티베트를 침공했다.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티베트는 중과부적으로 패전했다. 티베트군은 칭하이의 군벌 [[마부팡]]군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일개 군벌보다 강력했던 중화민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중공군을 상대로 티베트군이 싸워 버틸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했다. 티베트는 험준한 산악지대니 지형을 살려서 끈질기게 저항하면 중공군에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티베트군은 장기전에 필요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중공군 부대들도 산악전에 이골이 난 경험 많은 병력이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